"1996년 8월 7일"

인생의 용광로인 해병대로

 

도망자

 

사람이란 동물은 무엇인가가 내 코앞에 닥치지 않는한 아주 관망적인 자세로 기다린다. 티비를 보면 온갖 사건사고가 터지지만 ' 나한테는 저런 불운은 오지 않을꺼야 ' 라는 굳은 믿음으로 일상을 살아간다. 물론, 불운한 일은 그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위한 땡큐일 것이다.

 

나역시 나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것이 하나 있었다. 불과 1년전까지만 해도 군대라는 것은 완전 남의 이야기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이런 이야를 자주 하신걸로 기억한다.

 

" 니들이 군대갈정도 나이가 되면 아마도 통일이 되거나, 직업군인 제도가 확대되서 징병제, 그러니까 억지로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될 것이야~ "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내가 지금 발걸음을 옮기는 곳. 해군회관이다.

 

미친척 하고 해병대 지원했더니만 면접을 봐야 한다해서. 지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가뿐한 마음이 아닌, 될데로되라 라는 심정으로 면접장소를 향해 가고 있다.

 

해병대에 지원한것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회사에도 집에 일이 있어서 하루 쉰다고 이야기했고, 부모님은 뭐... 다 큰 아들 밥만 잘먹고 다니고 집에만 꼬박꼬박 들어오면 된다고 어디 가는지 묻지 않으셨고, 친한 선배들 친구들 후배들한테도 한마디 없이 일을 저질러 버렸다.

 

몇달전 엄청난 정신적인 타격으로 인해 한 1년쯤 도망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생각을 해보니 모아놓은 돈도 없고, 그렇다고 새우잡이 배를 탈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 생각의 끝에 끝에 군대라는 것이 보이더라. 의식주를 돈 한푼 안내고 해결할수 있는곳이 있다면 군대 아니면 깜빵이다. 불법을 저질러야 갈수 있는 깜빵은 제외하고 난 군대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것도 서둘러 가려면 지원을 해야 소원을 성취할수 있기에 해군, 공군, 해병대를 두고 고심 끝에 복무 기간이 제일 짧은 해병대를 선택했다. 뭐... 내가 선택을 했지만 그들의 일원으로 나를 선택하는건 그들의 몫이다. 별로 간절하지도 않다. 이거 떨어지면 해군이나 공군지원하지 뭐...

 

해군회관 도착.

우어~~ 뭔 지원자가 이리 많다냐?? 어쭈구리? 벌써 해병대 머리를 하고 나타난 인간도 있네. 하여튼 오바는... 쯧쯧....

 

필기 시험 비슷한 것을 간단하게 마치고 면접을 위해 지원자들이 강당으로 모였다. 한사람 한사람을 호명하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답을 하는 식이였다.

 

면접관들의 공통적인 질문은 '해병대 지원이유' 였다.

 

별의별 대답이 다 나왔다. 할아버지 해병대, 아버지 해병대, 형도 해병대. 그러니 나도 대를 이어 해병대를 가고 싶다는둥. 진정한 남자가 되고 싶어서 해병대를 가고 싶다는 둥... 그 외에도 전혀 기대할수 없는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면접관은 물론 지원자들도 웃지 않을수 없었다.

 

드디어 내 이름을 호명한다.

 

" 해병대 지원한 이유를 말해 보세요 "

 

" 군대갈 나이도 됐고, 이왕 가는거 고생도 좀 해보고 싶어서 입니다. " 라고 겁나게 큰 목소리로 답을 했다. 아주 뻔하기 뻔한 답을 말이다.

 

웃는것도 아닌 인상을 쓰는것도 아닌 아주 오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다음 지원자를 호명했다. 전체적인 면접절차가 종료되자 면접관이 이야기 했다.

 

" 합격 여부는 ㅇㅇ 월 ㅇㅇ 일 ARS 전화로 수험번호를 입력하면 합격 불합격 관계를 확인할수 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

 

그렇게해서 될지도 안될지도 모를 도피성 면접을 마치게 되었다. 군대가는데 뭔 경쟁률이 이렇게 치열한 거야 대체... 쩝...

 

드디어 합격자 발표날이다. 대학 합격발표도 아닌데 왜 이리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모르겠다. 무수한 소개팅을 갔었어도 이정도는 아니였는데 말이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사무실에서 ARS 전화를 걸었다. 떨리는 손으로 수험번호를 입력하니... 헐~ 합격이란다. 이게 기분이 좋은건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합격이란 단어가 나쁘지는 않았다. 태어나서 운전면허 합격 다음으로 듣는 두번째 합격소식이었다.

 

사무실 식구들한테 합격과 입대 소식을 먼저 알렸다.

 

소장님 " 니가 그 체력으로 해병대를? 미친놈 아니야? "

실장님 " 또 한명의 개가 탄생하는구나~ "

선임자 " 해병대 가면 성격 다 버린다던데... ㅉㅉ "

여직원 " 오빠가 해병대를? 워~~~ "

 

하여튼 고생길이 열린 직원한테 하는 소리들 하고는... 그래도 식구처럼 대해준 소장님 이하 직원들이 너무 고마웠다. 저런 말들이 결국은 화이팅 하라는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퇴근길. 발걸음이 무겁다. 태어나서 집을 길게 떠나는 것도 처음이지만 내 맘대로 그런것을 결정했다는 자체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자식이라고 딱 둘인데 하나는 육군 현역 복무중이고 (형과 6살 차이. 형이 군대 겁나 늦게감) 재롱둥이인줄만 알았던 막녀 내석이 그렇게 고생 심하다는 해병대를 간다고...

 

부모님과 저녁식사겸 군대이야기도 할겸 여느때와 달리 집에 일찍 들어갔다. 다행이 부모님께서는 집에 계셨다. 미리 전화를 해서 집에 계시라고 할수도 있었지만, 이녀석이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나... 라는 걱정을 하실까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들 둘이 있는 집이 거의 그렇지 않은가. 말도 없고, 웃음도 없고. 아마... 어머니는 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부터 많이 힘드셨을것 같다. 이놈이 재롱을 부리길 하나,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하나... 말이다.

 

그런 부모님을 밥상에서 마주 하는건 참 오랫만이다. 아침잠이 많은덕에 아침을 거르고 출근하는일이 다반사였고, 점심은 회사에서 해결하고 저녁은 친구들 아니면 선배들과 부어라 마셔라를 전전했기 때문이었다.

 

오랫만에 밥상에 둘러앉았다. 참 무뚝뚝한 가정이다. 침묵을 깬건 바로 나.

 

" 아빠, 엄마 저 군대가요 "

 

" 그럼, 스무살 되면 우리나라는 군대가야지. 아빠는 영장 못 봤는데... 영장 니가 받았냐? "

 

" 그게... 저 지원했어요. 오늘 합격 소식 받았구요 "

 

" 지원? 가만히 있으면 영장 나오는데 뭐 급하다고 지원을 했냐? 그런데 육군도 지원을 받냐? "

 

" 그게 아니구요... 해병대 지원했어요 "

 

순간 흐르는 정적과 이 시키 뭐지? 라며 나를 쏘아보는 부모님의 눈빛...

 

" 해병대? "

 

" 네. 해병대요 "

 

" 니가 거길 왜? "

 

" 그냥 지원했어요. 이왕 가는거 고생도 좀 하고.. "

 

이정도가 되면 '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 고생을 하려고 거길 가냐 ' 하는 이야기가 나올법도 한데. 아버지는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가셨고, 어머니는 내 앞에 앉아 계셨다.

 

" 아들아... 거기 굉장히 힘들고 위험하기도 하다던데... 잘 견딜수 있겠니? "

 

" 엄마. 다른데도 다 똑같아요. 소문으로만 들어서 그런거지 다 사람사는데잖아요 "

 

" 그래도.. 엄마는 벌써부터 걱정이 산더미 같구나. 다들 많이 힘들다고 하던데... "

 

" 아들 믿고 기다리세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

 

" 그래... 엄마가 기도해 줄테니까 지금 부터 잘 알아보고 준비하렴 "

 

" 네 "

 

그 이후로도 아버지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워낙 무뚝뚝하신 분이라... 그러나, 그 후에 막내 아들의 해병대 입대 소식을 온 동네에 다 알리고 다니셨다. 내가 동네를 지나가면서 어른들한테 인사를 하면 다들 한마디씩 하셨다.

 

" 이야~ 해병대 간다며? 고생 많겠네~ "

 

아무래도 ' 해병대 = 고생 ' 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는가보다. 어른들이 해주시는 말씀들을 건강하라는 의미로 감사히 받아들였다. 이 동네에서 걸음마 시작할때부터 보아온 어른들이기 때문에 그냥 동네 아저씨 아줌마보다 더 의미있는 분들이었다.

 

부모님. 그리고 혈육

 

잠시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아버지는 7남매중 막내로 어릴적 6.25 전쟁을 겪어보신 분이다. 아마 초등학교 입학 바로전이나 후가 될것 같다. 

 

하루는 누나들하고 놀다가 한쪽 다리를 다치셨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대수롭지 않은 상처라서 후시딘만 잘 발라줘도 나을만한 상처였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 전쟁통에 약이 어디 있겠는가? 할머니께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시면서 군의관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셨고... 아버지 이야기로는 이렇다할 약이 없어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된장을 소독용으로 발라 놓으셨다고 하셨다. 그러나, 구전은 구전일뿐... 결국은 상처 부위가 곪아 터지기 시작해서 더는 손쓸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하셨다.

 

이후 할머니께서 겨우겨우 군의관을 찾아서 데리고 오셨는데, 아버지의 상태를 보시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쪽다리에 장애가 생길것 같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다행히 더 악화되지 않도록 주사와 간단한 약 정도를 주고 갔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3급 장애를 가지게 되셨다.

 

난 어릴적에 아버지의 다리가 태어날때부터 소아마비와 같은 증상으로 잘못된것일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였던 것이다. 1950년대 60년대 70년대... 난 겪어보지 못했지만 너무나도 힘든 시간을 불편한 몸으로 보내셔야했을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편한 시선은 아니지만... 그시절에 장애인 이라는 편견도 그 세월에 포함됐으리라...

 

아버지는 먹고 살기 위해 안해본것이 없다고 하셨다. 지금도 시장에 가면 흔히 볼수 있는데, 사과 궤짝에다 사과를 올려놓고 사과장사도 하셨었고, 청량리역에서 판자를 펼쳐놓고 사탕도 파셨다고 하셨다. 그 시절에 통기타가 굉장히 유행했었는데, 돈주고 배울 형편이 되지않아 어깨넘어로 기타도 배우셨다고 한다.

 

내가 중학교때 기타를 배우고 싶어서 코드책을 사서 집에서 딩가딩가 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기타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아~ 망했구나~~' 당시 아버지는 철물점을 하고 계셔서 집에는 무엇이든지 부술수 있는 장비들이 가득차 있었다. '내 기타가 이렇게 가는구나...'

 

그러나 내 예상을 깨고 아버지는 아주 자연스럽게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하셨다. "오~~ 오~~~" 나는 옆에서 감탄사만 연발. 기타리스트의 실력은 아니였지만, 지금까지 아버지의 모습과는 완전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무뚝뚝한 아버지... 매일 술 드시고 어머니한테 나쁜소리하는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살면서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예능적인 사람이다. 모두를 즐겁게 해주는 이야기와 행동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능력자이신것 같다.

 

어머니는 천상 여자다. 우리 두 형제를 키우시면서도 욕한번 하신적도 없고 매한번 드신적이 없다. 항상 좋은말과 사랑으로 우리 형제를 키워주셨다. 독실한 크리스챤으로 지금도 그러하시지만 매일 새벽 예배를 가셔서 누군가를 위해 기도 하신다. 그 누군가가 우리 가족이라는걸 지금에 와서야 간절하게 느끼고는 한다.

 

내가 나쁜놈, 드러운 인성을 가진 놈이라는 얘기를 한번도 듣지 않고 여태 살아온걸 보면 어머니의 기도가 영험하긴 한 것 같다.

 

어머니는 성우가 꿈이셨다고 한다. 목소리가 좋으셔서 남들못지 않게 노래도 잘 하신다. 몇 십년을 교회 성가대로 봉사하시는 중이기도 하다. 나도 어머니의 피를 물려 받은 자식이라 한노래 하는데, 나도 꿈은 가수였다. ^^

 

내가 어머니를 대단하게 느낀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 못살고 힘들었을 시기에 한쪽 다리에 장애를 가진 남자와 누가 평생을 약속하려 하겠는가? 그것도 기독교를 완전 박해하는 아버지 같은 사람과 말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교회 다니시는걸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 어린시절 기억하는 부모님의 부부싸움 내용은 거의 99% 어머니의 종교 때문이었다. 부부싸움이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학대 수준이었다. 우리 형제는 어머니를 따라 어릴적부터 교회를 다녀서 부모님이 싸우시면 항상 어머니편이었다. 아버지의 우악스러움에 겉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매일 기도하시고 아버지가 크리스챤이 되길 바라셨다. 그 몇십년의 기도가 이루어진걸까? 아버지는 지금 교회 집사님이 되셨다. 그래도 어머니가 교회가서 오랜시간 봉사하시는걸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건 지금도 여전하시다. 다만, 어릴적 기억하던 무지막지한 박해 수준은 전혀~ 아니고. 잔소리도 100분의 1로 줄어 드셨다는 것이다.

 

내친김에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형에 대한 이야기도 해본다.

 

형은 나와 6살 차이가 난다. 부모님 말씀으로는 형과 나 사이에 2명인가? 형제가 더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 몸이 약하셔서 조산을 했다 하시는데. 지금이야 조산을 해도 인큐베이터에서 케어를 받으면 별 문제 없이 잘 성장하겠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그런것이 귀하기도 했거니와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에 거의 포기했어야 했다고 하셨다.

 

나 역시 예정보다 빨리 세상밖으로 나와서 먼저간 형들처럼 인큐베이터에 넣지도 못하고 신생아실에 그냥 뒀었는데... 어라? 이놈이 생명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지 허우덕 거리면서 잘 버텨줬다고 한다. 여튼... 내용은 그렇다.

 

아주 어릴때. 그러니까 형이 초등학생이고 내가 입학전이겠다. 그때는 형하고 치고 박고 많이 싸웠던 생각이난다. 물론, 덩치로나 힘으로나 아무리 뎀벼도 이길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꺽어보리란 생각은 했었던것 같다.

 

그렇게 맷집을 단련하던중 형이 중학교 입학하게 되었다. 더이상 형은 내가 알던 초딩이 아니였다. 초딩에서 중딩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전투력이 급상승했다. 나는 그때부터 개김이란 것을 포기하게 되었고... 그리고 시간은 점점 흘러 고등학교에 입학한 형의 전투력은 초사이언을 방불케했다.

 

무조건 형을 피하는게 오래 사는길이라고 굳게 믿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대입을 위해 재수를 하고 있는 형은 아침 일찍 학원에 나가서 밤 늦게 들어왔다. 방에 누워 있으면 형이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를 들을수 있었는데 (대단하지 않은가? 발자국 소리로 형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 ^^ ) 그 발자국 소리가 나면 나는 자는척을 했다.

 

공부라는 스트레스를 받고 온 형이 그 스트레스를 나한테 고스란히 풀것은 당연지사였기 때문이고. 마주쳐서 맘에 안들면 말보다 주먹과 발이 선행되었기 때문에 장수의 꿈을 이루려 억지로 잠을 청할수밖에 없었다.

 

형은 재수생. 나는 중학생. 어느날 이었다. 어김없이 형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바로 이불을 덮고 잠자는 모션을 취했다. 방에 들어온 형이 나를 깨운다.

 

" 왜에~ 형? "

" 넌 중학생이나 되는 놈이 공부는 안하고 이시간에 잠을 자냐? "

 

대꾸할수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맞았다. 그 다음부터는 형이 오는 소리를 듣고도 안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은 학교갈놈이 잠도 안자고 있다고 정말 어이없는 이유로 또 맞았다. 스무살이된 형의 주먹은 정말 날카로웠다.

 

형은 어릴적 축구도 했었고, 스케이트도 잘 탔었다. 작은키이긴 하지만 농구도 잘했고 수영도 잘했다. 아마 우리집이 경제적으로 풍족했더라면 운동선수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갈수록 형은 독실한 크리스챤으로 변해가더니, 교회 전도사가 되었고 군대는 군종으로 전역하고 전역후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결혼하고 신학공부를 더 하고 싶다면서 형수님과 어린 조카 셋을 데리고 옷가방만 싸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어릴적 나를 괴롭혔던 인과응보인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시는 은총인가? 형은 미국에 가서 무진장 고생을 했다. 아무리 준비를 하고 갔어도 말도 안통하고 생활 패턴도 대한민국과는 다르니 말이다. 울 형수님은 집에 전화오면 전화도 안받았다고 한다. 무섭다고... ^^

 

어쨌든 저쨌든 사서 고생을 한 드럼하고 지금은 한국에 들어와 목사님이 되셨다. 형에 대한 이야기가 어릴적 형제들의 다툼으로 미화하기엔 너무 일방적이었지만... 형도 가족을 위해 나를 위해 항상 기도해주는 고마운 혈육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청소년 시절에 비뚤어지지 않은 것도 형의 훈계와 무지막지한 가르침(?)이 큰 역활을 했을거라 생각된다.

 

마지막 여행

입대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내가 군대를 가야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회사도 정리했고, 친인척들에게 인사도 다녔다. 그리고, 지금은 친구녀석들이 있는 망상해수욕장으로 향하는 길이다. 입대전에 신나게 놀아보자고 이놈들이 하두 꼬셔서 먼저 가라하고 나는 후발로 가는중이다.

 

여자친구와의 이별후에 해병대를 지원하고 합격했다. 이별을 통보한 것이 나인데... 왜 이리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다. 버스를 타고가는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내가 대체 무슨짓을 한거야... 너무 미안해서 다시 볼 수도 없어.... " 계속 되풀이 되는 생각이었다. 입대전까지 그 생각은 계속 내 머리속을 맴돌았다.

 

그렇게 멍 때리고 있는 가운데 옆에 타고 있던 여자 승객이 말을 걸어 왔다.

 

" 과자 좀 드셔 보실래요? "

 

" 네?? 감사합니다~ "

 

나한테 왜? 라는 생각을 하는과 동시에 상대편의 호의를 무시할수 없거니와 입도 심심하던차에 넙죽 받아먹었다. 허기야 내 차림새를 보면 놀러가는 인간이 맞긴한데, 이놈이 몇시간을 아무말 않고 혼자란 말이지. 나이도 어려보이는데 이 피크철에 혼자 여행을 갈리는 없고... 계속 무언가에 홀린듯 멍 때리고 한숨만 쉬고 있으니... 아마 측은해 보여서 말동무나 해주려 한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과자 한 조각을 받고 배낭에 있는 음료수 한캔을 건네줬다. 그때 바로 뒤에서 들리는 소리.

 

" 이야~ 은영이 좋겠다~~ 음료수 선물도 받고~~ "

 

헐~ 옆에 앉아 있던 여자의 옷 차림새가 여행객이 아니여서 혼자인줄 알았는데 뒤에 친구 둘을 포함 세명이었던 것이다. 전부다 여행객의 차림은 아니었다. 뭘 그리 꾸며댔는지 입술하고 눈썹밖에 안보이는듯한 묘~한 화장술. 급하게 배낭을 뒤져 음료수 두캔을 더 내밀었다.

 

그리하야~ 동반자가 아닌 동반자가 되어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뻔하다. 어디서 왔는지, 몇살인지 등등... 첫만남의 필수 요건인 간단한 호구 조사가 끝난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용산 터미널에서 같이 고속버스를 탔으니 같은 서울에 사는건 뻔하고, 무슨구 무슨동에 사냐느니 나도 거기 가봤다느니 하는 등등... 공통 관심사를 찾게 되는 이야기들이었다.

 

누나들의 질문이 시작됐다.

 

" 근데... 왜 혼자서 여행을가? "

 

" 내가 사정이 있어서 두놈이 먼저 갔어. 누나들도 먼저간 일행있어? "

 

" 아니, 우리 셋이 가는거야~ 처음으로 친구끼리~ "

 

" 뭐야~ 그나이에 남자친구도 없고 ㅋㅋㅋ "

 

" 그런 너는 왜 혼자서 청승을 떨고 있냐? ㅎㅎ "

 

할말이 없었다. 과자를 건네기 전 까지 나를 유심히 관찰했나보다. 한숨만 쉬고 멍때리고 있는 나를 말이다.

 

" 그럼. 저녁은 우리텐트에 와서 먹어. 오늘 누나들 덕분에 아주 기분이 좋거든 "

 

" 야~ 너~ 지금 우리한테 작업거는거야? ㅎㅎㅎ "

 

아~ 또 할말이 없다.

 

" 그... 그게 아니라... 에이~ 시르면 말고~ "

 

" 알았어~ 도착해서 자리 잡고 결정해서 알려줄께~ "

 

" 그래~~ "

 

나보다 두살 많은 누나들이어서 편하게 이야기했고, 나 역시 끝에 '~요' 는 빼먹고 오늘 만난사람들 같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휴가철이라 차가 무진장 막혀서 지옥같은 여행길로만 생각했었는데 우연찮게 만난 누나들 때문에 그리 지루하게 망상 해수욕장에 도착을 하게 되었다. 버스에서 헌팅을 ㅋㅋㅋ 난 역시 난놈이다.

 

1996년 휴대폰이 귀하디 귀한 시절이어서 감히 개인마다 가지고 다닐수 없었고, 유일한 통신수단은 삐삐였다. 아~ 이 기쁜소식을 친구놈들에게 전해 줘야되는데 너무 아쉬웠다. 기다려라 이놈들아~~ 형이 휴가 선물로 서프라이즈를 가지고 가는 중이다.. 음 냐하하하~

 

오전 11시 조금넘어 출발한 버스는 하늘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시간에 도착을 했다.

버스안에서 이왕이면 우리 텐트 근처에 자리를 잡으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그럼 텐트 쳐줄꺼냐고 묻길래 그건 당연한것 아니겠냐고 했다. 누나들은 그럼 그것도 좋겠다고 하여 텐트를 설치해주기로 했다. 이것이 캠핑장에서 남자의 미덕이 아니겠는가?

 

목적지에 정차한 버스에서 나는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누나들의 짐을 같이 들고갈 짐꾼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놈들이 도착할 시간 즈음에 기다린다고 했는데...

 

헉~ 망할~ 이건 또 뭐야~

 

창밖에서 팔이 빠지도록 손을 흔드는 저 여인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아니, 몇일전까지도 같이 진탕 술자리를 같이한 여인네... 먼저 도착한 놈의 여자친구였다. 아니 왜? 저 여인네가 여기서 왜 나와? 이 색히 미친거 아니야?

 

물론, 각각 여친이 있으면 커플끼리 여행을 가는게 정석이지만. 지금 상황은 그게 아니잖는가? 지 여친만 덜렁 데리고 여길 오다니... 기본이 안된 놈이다. 저런 놈을 친구라고 만나고 있는 나도 참 한심한 놈이고.

 

짱구가 저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가..?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있다. 1분안에 나도 내려야 한다. 아~~ 아무리 짱구를 굴려도 답이 없다. 그런던중 버스에서 내렸다.

 

이 상황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2명의 멍멍이 친구와 한 멍멍이의 별책부록인 여인네가 드럽게 환하게 웃으며 나한테 다가 왔다.

 

" 기수야~ 왔어? 혼자 오느라 많이 힘들었지? 언능 짐풀고 저녁먹으러 가자~~ " 라면서 철썩 달라 붙었다. 이런 순간에는 자동적으로 쌍욕이 튀어나와야 되는데 초인적인 힘으로 참고 있었다.

 

순간 뒤에있던 누나들의 굳어지는 얼굴. 세명이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중에 한 누나가 하는말. " 너 이게 뭐니? " 라며 싸늘하게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서프라이즈가 물건너가고 있었다.

 

이에 나보다 더 당황하는 친구놈들. 그리고, 그놈의 별책부록. 저 멀리 사라져가는 누나들의 모습이 너무도 아쉬웠지만... 별책부록을 가방에 넣어서 집에 보내지 않는 이상 해결이 되지 않을 문제였기에 그냥 보내야만 했다.

 

친구놈의 여자친구를 앞에 두고 이놈들 한테 서프라이즈의 진실을 이야기 할수는 없지 않은가? 말해봐야 괜한 싸움만 되기 때문에 대충 얼렁뚱땅 넘기고 텐트로 이동하자고 했다.

 

어쭈? 이 색히가 지 여친하고 왔다고 텐트 두개를 쳐 놨다. 물론, 하나는 커플용이고 하나는 나랑 또 다른 한녀석이 쓸 텐트일 것이다. 이럴꺼면 지네들끼리 놀지... 안그래도 군입대가 코앞이라 싱숭생숭한 놈을 이 먼데까지 불러서 망신은 망신대로 다 시키고 그래.

 

버스안의 누나들과 헤어진 한시간이 지난 지금. 아직도 미련이 남는다. ' 저 꼴깝스런 커플들만 냅두고 친구랑 누나들한테 가버릴까? ' 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헤집고 다녔다. 슬쩍 친구녀석한테 얘기해보려 했지만... 친구녀석의 여친이 우리와 한시도 떨어져있지 않았다. 그래... 접자 접어... ㅠㅜ

 

밥보다는 술이다. 혈기 왕성한 20대에 저녁밥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리 거창한 안주도 필요없다. 아주 간단한 안주만 있어도 다음날 일출을 볼 수 있는 20대의 막강한 체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잠깐 친구 여친에 대한 정보. 친구녀석의 여친으로 만났지만 나이도 동갑이고 우리집에서 가까운데 살고 있었다. 주4회 음주가무를 즐기며 (4회에 3회는 내가 동석했다) 주량 또한 어마어마하다. 취한걸 본적이 없다. 주사도 없다.

 

아주 먼 나중의 일이지만 내 친구랑 헤어졌는데도 난 그놈하고는 절교를 하고 이 여인네와 더 많이 만났다. 썸 같은건 없었다. 남자같지 않은 남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여인네는 친구녀석에게 매우 아주 매~우 헌신적이었다. 그놈이 입대하고 자대배치 받자마자 이 여인네는 면회라는 글자를 달고 살았다. 남친이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구해다 줬고, 이 여인네가 실무병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면회를 자주 갔었다.

 

그런 여인네를 정식나간 친구 색히가 전역하고 얼마되지않아 발로 뻥~~~ 차버린것이다. 이게 그놈과 절교의 이유가 되었다. 인간 말종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뭐... 이런류는 아니지만 말종중의 한놈이었다.

 

그리하야~ 모두를 위한 서프라이즈는 요단강을 건너갔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로 일출을 볼때까지 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젠 피곤함도 모르겠다. 이 세계를 떠나 다른세계에 몸담아야 하는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것 밖에는...

 

오전에 잠시 눈을 붙이고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사러 해수욕장 근처 슈퍼에 갔다. 점심때여서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먹을거리를 대충 고른 다음에 계산대로 갔는데 특이한 복장의 점원을 발견했다. 군인들이 입는 옷으로 만들었는지 그런 재질의 카우보이 비슷한 모자를 눌러쓰고, 피부를 검개 그을려 검은색 나시티를 입고 있는... 약간의 거부감이 드는 점원이었다.

 

가슴팍엔 황색 새가 한마리. 등판에는 어지러운 문양으로 수를 떠놓은 글자들. 상단에 써 있는 글자는 해병대!!

 

어쩐지 인상부터 다르다 했더니 그 점원은 얼마후 내가 몸담을 해병대 출신이었다. 궁금한게 많아서 몇가지 물어보려 말을 건넸다.

 

" 저기요~ 혹시 해병대 출신이신가요? "

 

" 네. 그렇습니다마는? "

 

" 아~~ 다른게 아니구요. 저도 얼마후에 해병대 입대하게 되서 궁금한게 있어서요 "

 

갑자기 어이없는 웃음을 날리더니 다른 사람을 불러 카운터를 맡기고는, 사람이 많으니 시간이 괜찮으면 다는데가서 얘기하자고 해서 졸졸 따라갔다. 정말 겁대가리 없는 행동이었다.

 

" 몇기? "

 

헐~ 언제봤다고 반말을? 그래도 나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이니 존대를 할 수 밖에...

 

" 787기로 입대 합니다 "

 

" 아놔~ 개쫄이군 그래 "

 

군대를 가보진 않았지만 개쫄이란 말은 이해가 가는 단어였다. 그리고나서, 담배를 하나 꺼내물고 불을 붙이더니 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 내가 전역한지 얼마안됐다. 부모님 가게일 도와 드리느라 여기 있는거지. 근데 궁금한게 뭐냐? "

 

" 아~ 네... 덜컥 해병대 지원해서 합격을 했는데 군생활이 어떤지 궁금해서요... "

 

" ㅋㅋㅋ 그건 가봐야 알지. 내가 생활한거 알려주면 안가려고 할껄? "

 

" 대충이라도 얘기해 주시면 도움이 많이 될것 같은데요? "

 

" 음... 힘들다는건 알고 지원한거지? "

 

" 네... 거기까지밖에 몰라요 "

 

" 아마... 니가 여태 고생이라고 느낀건 애들 소꿉장난일꺼야. 이게 말로 설명하려면 일주일을 해도 모자라. 그냥 눈 딱감고 전역하는날까지 참는게 좋을꺼야. 착한 선임 만나면 괜찮겠지 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마라. 환경이 사람을 바꾼다는말 알지? 부처님이 들어와도 악마로 변하는 곳이 해병대라는 곳이다. 그렇다고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은 아니야. 무조건 참고 견뎌야 된다. 그럼 엄청난 성취감을 맛볼수 있을거다. 그 이상은 가서 겪어봐. 다 얘기해주면 재미 없다 ㅋㅋㅋ "

 

" 아... 네... 감사합니다 "

 

" 그리고, 지금이야 니가 날 보고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다음에 날 만나면 아마 못 웃을거다. 고생해라. 니 손에 들려있는건 그냥 가져가라. 해병대 후임이 될 녀석한테 베풀었다고 생각하마 "

 

"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다시 찾아뵐께요~ "

 

해병대 군생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커녕 겁만 잔뜩 주고 별 영양가 없는 대화였다. 우연찮게 만난 해병대 전역자의 이야기가 뇌리에 쑤셔 박히고 온몸으로 경험하게 된것은 불과 3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고된 여행의 시작

 

서울로 올라왔다. 이제 3일 남았다. 궁금하기도하고 가슴도 두근거리는 해병대라는곳. 주위 선배들이 면제나 방위가 많아서 해병대에 대한 데이터도 없다. 그냥 많이 힘들다는것 밖에...

 

사실... 입대를 몇일 앞두고도 고민을 많이 했다. 8월 7일로 해병대 영장이 나와 있었고, 8월 8일로 육군 영장이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해병대는 지원 입대라 맘에 안들면 가지 않아도 되었다. 하루차이다. '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무 오바한거 아닌가? 내가 무슨 해병대야... 그냥 육군을 갈까? '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친구 선배 친지들한테 해병대 간다고 큰소리치고 이미 인사도 다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래도... 그냥 한번 망신당하고 육군을 갈까? 요즘 육군 엄청 편하다는데...

 

1996년 8월 6일

입대일이 내일이다. 내일 1시까지 포항에 있는 해병2훈련단으로 가야한다. 아버지는 오전에 " 기수야 몸 조심히 훈련 잘 받아라 " 라는 이야기를 하시고는 피서를 떠나셨다. 참 대단하신 분이다. 막내아들이 멀리 포항 해병대에 입대하는데 여행을 가시다니... 어머니는 내 입대 모습을 보시려고 피서를 가지 않으셨다.

 

동갑인 사촌 녀석도 포항까지 함께 가주겠다고 집에 왔다. 사촌녀석때문에 그럭저럭 심심치 않은 시간을 보낼수 있었다. 어릴때 놀던 이야기, 철없던 학창시절의 이야기 등등... 이녀석 아니면 같이 할수 없었던 추억들을 다 끄집어냈다.

 

도통 잠이 오질 않는다. 이럴땐 소주 한병 딱~ 하면 잠이 오게 마련이지만, 그 좋아하는 술도 지금은 먹고 싶지 않다. 머리속에는 온통 또 다시 헤어진 여자친구 생각이다. 일방적이었다. 방어할 틈도 주지않고, 얘기를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비겁했다. 나쁜놈이다.

 

새벽 5시... 2시간정도 잠을 자고 일어났다. 욕실에 가서 양치를 하고 세수를 했다. 여느때와 다르지 않게 수건 머리를 말리려고 하는데. 허전했다. 그랬다... 입대전에 짧은 머리를 하고 오라해서 몇일전에 짧게 잘라 버렸다. 지금 서있는곳에서 내얼굴을 언제쯤 다시 비추어 볼수 있을까?

 

집을 둘어보았다. 내 손길이 닿은 곳은 없지만... 그리 좋은 집도 아니였지만... 내 눈에 다 저장하고 싶었다. 집을 떠나는게 아쉽다... 그리고,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지 못한게 너무 아쉽다...

 

어머니와 사촌 녀석과 함께 강남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포항가는 버스표를 끊고 대기시간을 이용하여 아침을 먹었다. 밥이 잘 넘어갈리가 없다. 잠을 자지못해서가 아니다. 답답한 마음때문이었다. 새로운것에 대한 도전...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이 아닌가 싶다. 초등학교때의 보이스카웃, 중고등학교때의 수련회가 아니잖는가.

 

내 성격이 조금 내성적인편이라 사람 사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상대방의 간을 보는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이 항상 두려웠다. 난 어쩌면 해병대 생활 보다는 모르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더 힘들지 않을까 여러번 생각 했었다. 정말 답답했다...

 

무작정 공중전화를 찾아서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것 저것 생각하기엔 시간이 너무나도 아까웠고 이제 남은 시간도 얼마 없었다.

 

" 여보세요? "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온다는게 이런 느낌인가보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목소리...

 

" 어... 나야... "

 

" 응? 기수?? "

 

전혀 예상치 않은 인물이 전화를 해서 놀란듯 싶었다.

 

" 응... 잘 지냈지? "

 

참 염치 없는 인사였다.

 

" 그래... 넌? "

 

" 나야 뭐... 그냥 그렇지... 나 군대가 "

 

" 정말? 언제 가는데? "

 

" 오늘이 입대일이야. 지금 버스 터미널이고. 다른 사람은 몰라고 너한테는 꼭 이야기 해주고 싶어서 전화했다. "

 

" 그걸 왜 이제서야 얘기해... 빨리 얘기했어야 맛있는것도 사주고 하지... "

 

" 그냥... 내가 뭐라도 되는 사람도 아닌데... 여튼 다녀올께 "

 

" 육군 훈련소가 어디야? "

 

" 아니.. 해병대 지원했어... 포항에 훈련단이 있고... "

 

차마 이별 때문에 도망가다 싶이 지원했다고 얘기는 할 수 없었다. 뭐... 그럴 자격도 없고.

 

" 해병대? 거길 왜? 엄청 힘들다고 하던데 "

 

" 그냥... 고생도 좀 하고 싶고... 해서.... "

 

" 그럼... 훈련소 가면 꼭 편지해... 꼭이다? "

 

" 그래... 알았어... 다녀올께 "

 

" 응, 몸 조심하고... "

 

답답한 마음에 전화를 했는데... 지금은 더 답답하다. 미안하다고 얘기를 했어야 됐는데... 그랬어야 했었는데... 너무 미안하면 미안하다는 이야기마저 못하게 된다하던데.. 내가 그짝이었다. 너란 놈이 그렇지 뭐...

 

어제 잠을 설쳐서 그런지 포항으로 내려가는 버스안에서 잠이 들었다. 차라리 잠을 자는게 편했다. 잠시나마 잡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드디어 포항에 도착. 어머니와 사촌녀석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갔다. 입소날인지 사람이 많았다. 가족들과 연인들과 함께 식사중인 까까 머리의 사람들. 제법 군인티가 나게 머리를 깍은 사람들도 있었다.

 

어머니는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하셨다. 막내 아들의 입대가 엄청 서운하셨던 모양이다. 당사자인 나 역시 밥이 잘 넘어갈리 없다. 마치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에 있는듯함 묘한 느낌이었다.

 

입소시간보다 조금 더 빨리 입소장소로 들어갔다. 온통 붉은색 바탕에 노란색 글씨.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절대 적응할수 없을것 같았다. 지원자인 나 역시 그랬으니까 말이다.

 

어머니와 같이 앉아 있는데 약간은 어색한 자세로 군복을 입고 현역병에게 어머니가 물었다.

 

" 군인 아저씨. 해병대 훈련 힘든가요? "

 

잠시 주위를 살피며 머뭇거린 현역병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죽지 않을 많큼 힘듭니다 "

 

" 그렇게나 힘들어요? 우리 아들이 잘 견뎌낼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요 "

 

" 걱정마십시오. 저도 아드님처럼 평범한 아들이었습니다. 조금만 견디면 됩니다 "

 

" 네...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

 

해병대가 자랑하는 팔각모를쓴 현역병은 작대기 두개인 일병이었다. 여기 근무하는 사람들은 대체 인상이 좋은 사람이 없는가보다. 정말 환경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걸까?

 

드디어 세상과 작별 인사를 해야 할 시간이다. 어머니품에서 자장가를 들으며 잠을 청했던기억. 기분좋게 술을 드시고 노래하시던 아버지. 무섭지만 내 청소년때의 방패막이가 되어준 고마운 형. 어릴적 친구로 만나 연인이 되었던 헤어진 여자친구... 정말 다시 볼 수 없을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소자들을 부르는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집합대열에 몸을 숨겼다. 멀리 어머니와 사촌 녀석이 보인다. 26개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에 비하면 얼마 안되는 시간이긴하지만 왠지 아주 길게 느껴질것 같은 기분이다. '어머니 걱정마세요. 잘 참고 견디고 이겨서 돌아갈께요' 라며 멀리보이는 어머님께 마음을 전했다.

 

훈련교관

 

전국 8도에서 해병대에 지원한 건장한 청년들이 모여있다. 인원은 대략 400여명. 8도 사나이라는 유명한 군가를 잘 알고 있을것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참 탁월한 가사인것 같다.

 

모든것이 낯설기만 하다. 지금 내가 서있는 포항땅도, 6주동안 같이 지낼 이녀석들도... 이렇게 멍때리고 있을 무렵.

 

손에는 백장갑을끼고 북한 공산당의 제복과 비슷한 옷을 입은 사내들이 나타났다. 누가 얘기하지 않아도 이 사람들이 우리를 훈련단 깊숙한 곳으로 안내할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인사를 시키려 느려터지고 껄렁껄렁한 녀석들을 줄맞춰 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 400여명의 8도 사나이들은 해병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기까지는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는것...

 

무협 소설을 많이 본 사람이라면 '전음' 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입을 벌리지 않고 기를 이용해서 상대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줄을 맞추고 있는 사내들이 전음 비슷한걸 날렸다. 복화술이라고 하나? 입술은 움직이지 않고 이를 악 물고 지나다니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 이런 개XX들. 니넨 이제 다 뒤졌어. 감히 훈련교관이 이야기를 하는데 말을 안들어? 지옥에 가서도 니들이 웃고 떠들고 오합지졸로 행동할지 한번 두고 보자 "

 

열마디를 하면 일곱 마디가 욕이었다. 욕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그러나, 이 사내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엄청난 중압감이 느껴졌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두렵게 만들고 죽일수 있다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단체로 부모님들께 인사를 마치고 훈련교관의 지시에 따라 훈련단으로 향했다.

 

훈련교관은 연신 " 하나 둘 셋 넷 " 을 외치며 400여명의 팔도사나이들에게 온갖 욕을 퍼부으며 훈련단으로 안내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지옥으로 가는길. 절대 순탄하지 않았다. 지옥 구경을 위한 전초전이라고나 할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8월의 이글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오리걸음, 풋샾, 어깨동무하고 앉았다 일어서기 등등... 중고등학교때 극기 훈련가서 해 봤었던것을 복습하며 지옥의 문으로 한걸음 한걸음 발을 옮겼다.

 

드디어 훈련단 연병장 도착. 입대전 운동 좀 했던 녀석들은 별로 지친 기색이 없었으나, 그렇지 않은 부류의 인간들은 지칠대로 지친 모습이었다.

 

지옥의 사자들은 우리를 쉴틈없이 몰아붙였다. 옆사람과 얘기를 하거나 웃고 떠드는 모습이 보이면 전원이 기합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사복 입고 있을때 많이 떠들고 웃어두라는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웃음을 보며 했던 말이었다. 이후 6주동안의 훈련이 끝날때까지 훈련교관들의 웃음을 전혀 볼 수 없었다. 대신에 히히덕거리고 웃다가 훈련교관의 눈에 발각되어 먼지나게 맞거나 오줌을 지리기전까지 혹독한 기합을 받는 동기들은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6주의 훈련 기간중 하루가 시작되었다. ' 될대로 되라 ' 라는 말이 지금 가장 잘 어울리는것 같다. 인생의 용광로 해병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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